평등에 대한 오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 유엔총회가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의 제1조에 포함된 문장이다. 굳이 세계인권선언까지 찾아보지 않아도, 그동안 우리가 받은 교육에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내용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평등하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답은 “같다”는 것이다. 무엇이 같다는 것인가? 국어사전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은, 모든 사람의 권리, 의무, 자격이 같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이 설명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미성년자에게는 투표권이 있고 성인에게는 투표권이 있는데, 미성년자와 성인은 같은 권리를 갖지 않으므로 이들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평등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분별하게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것은 특정 영역, 예를 들어 대한민국 헌법 11조가 보장하는 법 앞의 평등이라든가 인권, ‘유권자 개개인의’ 투표권 등에 적용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언급하는 평등은 이런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수입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재능의 총합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중 어떤 이들은 개개인이 기울인 노력, 그리고 능력마저 평등하다고 믿는다.
당연하게도 이것들은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살펴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과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요소 외에 의식적인 훈련, 연구, 몰입과 같은 다른 요소들을 모두 고려했을 때, 가장 노력하는 사람은 그저 그런 사람의 수십 배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은 직접 목격하기 전에는 잘 와닿지 않기 때문에 쉽게 오해되며, 잘 정정되지 않는다.
재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특정 영역에 대한 재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은 꽤 잘 받아들인다. 대신 그들은 다른 평등성을 주장한다. 모든 사람의 재능의 합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실현된다. “누구는 A도 잘하고 B도 잘하고 C도 있고… 그런데 왜 나는?”
이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선생님이나 부모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형제자매나 친구들과 서로를 놀리거나 무시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 다르단다. 너는 이것을 잘하지만, 걔는 다른 것을 잘할 거야”.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그들이 재능의 분배에 관한 연구 결과를 설명하려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다툼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사람마다 잘하는 분야와 그 잘하는 정도는 모두 다를 수 있지만, 그 총합이 같다는 것은 다소 억지스럽다. 애초에 그 총합이라는 것이 측정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누가 그것을 측정하여 분배한다는 말인가?
사람마다 가진 재능과 기울인 노력이 다르기에, 그들이 가진 능력은 다르다. 그런데 능력이라는 것은 어떤 능력을 뜻하는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부를 창출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부를 창출하는 능력의 차이는 곧 수입의 차이를 의미한다. 돈은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돈은 부를 교환 가능하게 만든 것이므로, 더 많은 부를 창출한 사람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린다. 1 여기에 불평등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2
나는 대부분의 오해들, 특히 수입이 평등해야 한다는 오해와 그와 관련된 오해들이 정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불필요한 분노를 잠재우고 그 에너지를 부의 창출과 개인 및 사회의 발전으로 돌릴 것이며, 사람들이 갈수록 흔해지는 허튼소리들을 그 외의 것들과 구별하게 해줄 것이다.
‘대부분의 오해’들이 정정되어야 한다고 한 것에 주목하라. 나는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기를 기대하는 것이지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오해들은 정정할 필요 없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던 때, 어떤 학생은 나에게 “모든 사람은 평등한데 왜 서로 경쟁해서 성적별로 다른 대학을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학생과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나는 다만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을 나서는 학생의 가방을 두드려주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논의한 것들은 많은 사람을 화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을 만족시키는 평화로운 의견만이 성숙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밍 언어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면 그곳에서도 같은 종류의 오해가 발견되는데, 그 논쟁에서 모든 언어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성숙한’ 자세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모든 언어는3 튜링 완전성이라는 측면에서 평등한 것이지 그것의 기능, 표현력 등의 특징까지 평등한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밍 언어에 관한 논쟁은 결국 최근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주요’ 언어들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으며 필요에 따라 다른 언어를 학습,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쪽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오해들도 이처럼 점차 정정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