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에 대한 담론
소신을 지키는 것은 멋있는 태도이다. 그런데 그것이 멋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눈앞에 놓인 문제보다는 큰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런데 어려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꺼번에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일을 잘한다고 멋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소신을 지키는 것이 멋있는 이유는 어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우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함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월한 능력을 갖추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첫 번째 이유는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소신과 능력이 관련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 둘은 별다른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극단에 대해, 예를 들어 미성년자가 어떤 분명한 이유로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그 아이가 제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때 충분한 능력이 없다면 소신을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위한 충분한 능력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소신을 지키는 것은 단지 능력 있는 이들의 특권일 뿐일까? 내가 보기에 소신은 그렇게 쉽게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성취라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했을 때, 이것은 쉽게 드러난다. 소신의 결과는 이진적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성취가 언제나 Pass/Fail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부분 연속적인 형태를 보인다. 다시 말해 소신을 지키는 것과 능력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값을 얻느냐의 문제이다. 1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려면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치는 일은 흔하다. 소신이라는 것 자체가 희생을 내재한다. 언제나 그렇다. 몇몇 상황에서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한정된 자원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목표를 향할 때 소신에 따라 어려운 길을 택한다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내기 위해서 다른 일에 투입할 수도 있었던 자원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소신과 희생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선택일 뿐이다. 2
물론 우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소신을 지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한 개인으로 시야를 좁힌다면, 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 소신을 지킴으로써 덜 성취하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덜 성취하게 된다고 해도 소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리처드 해밍은 ‘당신과 당신의 연구’ 3 라는 강연에서 시스템을 바꾸는 사람과 일류의 연구를 하는 사람 중 무엇이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성취하고 싶은 일을 향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마당에 불필요한 희생을 왜 감수하냐는 말이다. 삶을 성취에 대한 일종의 최적화 문제라고 본다면 그의 말에 반박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삶의 최우선 목표가 최대한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성취는 삶의 최우선 목표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취’가 ‘의미’보다 상위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저명한 임상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은 의미가 부재한 삶은 고통스럽고 허무하며 절망적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해지려면’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삶 자체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욕구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라고 봐야 한다. 성취는 의미를 위한 것이다. 삶의 유한성에 비추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또렷해진다.
삶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은 소신에 관해 다음과 같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것은 소신 또한 의미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조던 피터슨은 동의하지 않는 말은 하지도 글로 쓰지도 말라고 강조했다. 4 그는 그것이 정신을 손상시킨다고 설명했는데, 나는 그것이 삶의 의미 또한 훼손한다고 첨언하고 싶다. 자신이 굳게 믿는 바를 행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 그것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만큼이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지 못하는 것은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떠도는 것과 같다. 설령 신대륙을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신은 의미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면 더 적게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피터슨은 소신을 숨기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위험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소신은 의미를 위한 것이지 멋을 위한 것도 아니고 엄격하게 지켜야 할 규칙도 아니다. 눈앞의 이득을 위해 소신을 굽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곧 충돌하는 차의 핸들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소신이 의미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과가 어떻든 일관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소신을 지키는 것에 기존의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거나, 자신을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넣는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오해는 각종 매체에서 소신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탓이다. 완곡어법은 언제나 열려있다.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은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만큼 멋있지는 않겠지만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행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는 충분하다. 헨들을 반대로 돌려야만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관행과 시스템에 균열을 내거나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나는 리트머스 시험을 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5 그는 표면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길임을 의미한 듯하다. 하지만 그의 일언은 앞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침묵하거나 생략하는 것이다. 침묵과 생략을 통해 이견을 표출하는 방식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으면서 메세지를 전달하고 기존의 관점에 균열을 일으킨다. 김영민 교수의 아래 예시는 이들의 전복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6
이 사회에서 유행 중인 자기계발서 제목은 대체로 문장의 형태에 가까운 긴 제목을 달고, 거기에 달콤한 부제를 덧붙이는 관행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인생 앞에 홀로선 젊은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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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행이 지배적일 때, 누군가 부제를 생략한 채, 다만 ‘끙’이라는 한 글자로 책 제목을 지었다고 상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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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끙’은 관행이 된 수선스럽고 달콤한 제목들에 대한 경멸, 그런 베스트셀러를 내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에 대한 조소, 그리고 자기계발 해봤자 소용없다는 고백을 동시에 담을 수도 있는 대안적인 제목인 것이다.
소신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얻어낸 것은 고무적이다. 그동안 모호한 대상으로 여겼던 소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모호한 대상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되어 있다.
생각이라는 것은 표현되기 전까지는 대단히 모호하므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것이 글이 되는 과정은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를 옮겨적는다기보다는 스스로가 동의하는 글이 나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것이 된다. 글이란 표현의 도구인 동시에 생각의 도구이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소신에 관한 생각은 청소년기부터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제서야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담론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논의한다는 뜻이다. 소신에 관해 생각해온 지금까지의 시간, 그리고 이 글이 나오기까지의 시도들, 그것들 자체가 소신에 대한 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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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는 앞서 언급한 미성년자의 예시, 그리고 ‘어떤 값을 얻느냐의 문제’는 뒤에 언급하는 덜 성취하는 문제에 대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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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비용을 고려한다면 선택에도 희생이 뒤따른다. 사실 모든 것은 희생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문성도 잠재력을 희생한 결과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희생은 그런 넓은 의미의 희생이 아님은 충분히 공감되리라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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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nd Your Research 당신과 당신의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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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머스 시험은 산·염기를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테스트이다. 시험지의 색이 붉은색인지 푸른색인지를 이용해 용액의 산·염기를 판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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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각은 전적으로 과거에 읽었던 김영민 교수의 글 덕분이다. 이곳에서 인용한 부분이 포함된 전문을 읽을 수 있으며 해당 글은 김영민 교수의 저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에도 실려 있다. ↩